다른 세계들을 상상하게 해주는 급진적인 잠재력이 사변적 사유에 있다고 믿는다.
대학 동기들과 다녀온 <서도호: 스페큘레이션스>. 전시 제목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느낌이라, 말 그대로 ‘사변’이라는 수식어가 너무 잘 어울렸다.
특정 작품보다는 작가 자체에서 감명을 많이 받은 전시다. 그 사변적인 것들을 실제 경험으로 끌어오기까지의 구체적인 노력, 함께해주는 사람들에 대한 겸손과 감사가 느껴져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작가 또한 작업을 하면서도 구현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에 작업물이 실현되었을 때 더 큰 짜릿함을 느끼는 게 아닐까. 작업을 할 때에 저런 애티튜드를 가져야겠다고 반성하고 다짐하게 되는 계기였다.
1층은 드래프트가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 드래프트들이 실현되었을 때의 모습이 스크린에 나온다.
그중에서도 사진 속의 잠수복과 부표로 지은 다리로 '이상적인 집'에 가겠다는 상상이 제법 웃겼다. 의도한 듯한 요상한 애니메이팅이 그 위트를 더했다. 방문 전 '서도호 전'이라는 정보만 있었기에, 이때까지만 해도 전시의 갈피를 못 잡았지만 여러모로 재밌었다. B급인척하는 S급은 언제나 즐겁다.
서양식 건물에 불편하게 끼어있는 한옥이 미국 사회의 아시아계 이주민 같다고 생각했다. 바로 옆 건물에 새겨진 'DO YOU LIKE YOUR NEIGHBORHOOD?'라는 페인팅이 시사하듯 이웃들은 저 불안한 한옥을 좋아할 것 같지 않다.
그 불편한 집이 아시아계 이주민에게는 둘도 없는 '집'이다. 집은 존재하지만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사회에 '끼어서' 잘 살아가 보려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이기도 한다.
또 다른 연결하는 집. 대뜸 다리에 박혀있는 한옥. 다양한 국가에서 활동했던 이민자로서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싶었던 것 같다.
다른 이야기지만 작품명은 <연결하는 집 (Bridging Home)>인데, 현재 국현미에서 <연결하는 집(Performative Home)>이라는 같은 국문 제목, 다른 영문 제목으로 전시를 진행 중이다. 조만간 방문해 볼 예정이다. 같이 생각할 거리가 늘었다.
지식이 부족해 역사적인 타당성은 잘 모르겠다. 유적지 터의 구멍에서 시작하여 꼬리를 물고 상상 속의 신전을 구현한 것이다. 아마도 이 또한 사변적인 성질이 강한 프로젝트로 보인다.
어린 시절 살았던 집과 정원을 1/16으로 줄인 작품이다. 한국적인 것들로 가득한 집과 정원이 미국적인 공간에 안착하여 그 안에서 꽃을 피우고,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이 영상에 담겨있다. 그 모습이 여러모로 이국적이면서도 흥미로웠다. 식물들이 자라며 트럭은 점차 모습을 감추고, 마치 그 환경에 정말로 융화된 것처럼 조화되는 모습이 재밌다.
<연결하는 집>처럼 '이방인이 융화되는 과정'을 담아낸 것 같다. 다만 전자는 이방인으로서 그 불편감에 주목했다면, 이 작품은 이국적인 조화로움에 주목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른 양식의 건물이 말 그대로 '날아와' 천장에 박혀버린 콘셉트. 제목도 생각도 건축도 모두 흥미롭다.
마지막은 철거 직전의 아파트를 천천히 나열하듯 보여준 영상. 화려한 연출은 없었지만, 어케 만든겨 소리가 절로 나왔다. 벽과 층을 관통하면서 보여주는 서로 다른 라이프스타일이 마치 큰 껍데기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유기체 같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이미 끈끈하게 결합한 건축물을 일방적으로 무너뜨리는 행위가 현대에 들어 퇴색되는 공동체 의식 같다고도 느껴졌다.
사라지거나 구현되지 못한 국가 건축 사업들을 다루었던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전>이 많이 생각났다. (2019년) 물론 이는 이름에서부터 나타나듯, 사멸해 버린 기획안, 무너진 희망, 문제의식이 주였다면, <스페큘레이션스>에서는 기획안들이 비록 구현되지 않더라도 그것들이 어떻게 생각의 물꼬를 물었는가에 집중한다. 상대적으로 희망차고 위트있는 분위기로 재밌었고, 전시 기획에 따라 이렇게나 달라지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과정들이 현실이 되는 것을 지켜보자니, 내가 상상하는 것들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한 편의 응원처럼 느껴졌다'는 친구의 감상평도 함께 전한다. 사실 그 어떤 평보다 친구의 말이 가장 잘 와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