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 꿈꾸는 물질의 세계

 

 초상품의 시대

 

너무 많은 가공을 거쳐 원재료와 동떨어진 음식을 초가공 식품이라고 한다. 음식을 소비하기 편리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 형태와 성질이 바뀐다고 하던데, 이것은 비단 음식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자연에서 원료를 가져와 다양한 사물을 만드는 우리 인간은 모든 사물을 수단화하며 물건처럼 이용한다. '초가공' 식품처럼 우리는 '초상품' 시대를 살고 있다.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사물을 돌과 같이 무심하게 놓여 있는 무생물로 보고 스쳐 지나가지 않았는가? 한 번도 유심히 살펴보지 않았던 대상을 문득 탐구할 대상으로 두면, 주변 풍경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 포스터

 

이 전시는  '낯설게 하기' 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당연히 여겼던 사물의 세상을 다르게 인지하도록 권유하고, 고착화된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 사물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말이다. 전시를 보면서 몇 년 전 굉장히 재밌게 보았던 아르코 미술관의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 전이 생각 났다. 특히 물질에 중심을 두어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기존 인식의 틀을 깨부순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만,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전에서는 인간과 환경의 이분법에 대해 주목했다면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전에서는 사물의 도구화, 인본주의 탈피라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1. 전시인사 안녕하세요.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아주신 관객 여러분 반갑습니다.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는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기획전인데요, 여러분은 사물이라고 하면 어떤 것

www.mmca.go.kr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

 

두 번이나 방문했던 전시지만, 여느 때와 같이 모든 작품을 소개하기보다는 인상 깊었던 작품만을 소개하려고 한다.

 

<Materialism>,순서대로 AK-47, 전구, 가젤자전거

 

전시장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나는 Studio Drift의 <Materialism>. 사물의 분해하여 원재료의 비율대로 큐브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가령 전구는 우리 모두가 유리구, 필라멘트, 소켓 등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작품만 봐서는 본래의 형태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작품명을 보지 않고 맞춰보는 재미도 있다. 원재료의 관점에서 구성되고 해체되는 사물의 본질과 그 잠재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가변하는 소장품전>에서도 느꼈지만, 주제 의식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을 맨 앞에 배치하는 것 같다. 

 

<가변하는 소장품전>, 관계 · 크기 · 장소가 만들어내는 변화의 예술

국립현대미술관#1. 전시 인사말 ‹가변하는 소장품› 전을 찾아주신 관람객 여러분, 반갑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가운데 다양한 조건과 ‘가변적인’ 특징을 가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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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라이트(Shylight)>, 스튜디오 드리프트

 

 스튜디오 드리프트(Studio Drift)는 국내에서는 위의 조형으로 더 유명한 것 같다. 네덜란드 출신의 아티스트 듀오로, 재미있는 작업물이 많으니 한 번쯤 포트폴리오를 구경해봤으면 좋겠다.

 

 

Home - Studio Drift

 

studiodrift.com

 

 

<보텍스>, 이장섭

 

이장섭 작가는 주로 해조류를 재가공하여 만든 섬유 소재를 활용하는데, 이미 디자인 업계에서 유명하신 분이셔서 어떤식으로 디스플레이를 했을지 궁금했었다. 메탈릭 테이블에 보택스의 원재료인 해조류들을 실험실처럼 나열해 재료의 가공과정과 그 뿌리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재료와 섬유를 한눈에 비교해 가며 보니 새삼스레 신기했다.

나는 보텍스를 DDP 아트샵에서 처음 알게 됐었다. 같은 소재로 만들어진 <Vortax carbon vase>가 실제 판매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재료에 대한 정보가 없어 천도 돌도 가죽도 아닌 것이 질감이 독특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엉뚱한 곳에서 뒤늦게 해조류라는 걸 알아서 기분이 묘하다.

 

<진실에 접근하기_아톰> , 신기운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선호의 대상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든 물질적으로 소장하려고 한다. 이 작품은 물질로 대표되는 아톰 피규어를 갈아냄으로써 그것에 담긴 사회적인 의미를 갈아버리고 원재료 자체로 되돌려버리는 영상 작품이다. 그라인더로 갈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역재생이 되면서 그 형태가 복원되기도 한다는 점이 재밌다. 

 

<시티펜스>, 박소라

 

인터페이스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계를 물리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개인적으로는 제일 잘 와닿고 좋았다. 제목에서 잘 나타나듯 인터페이스는 디지털 세상에서의 구획, 즉 펜스 역할을 한다. 인간의 손에 의해서 움직이고 기능하던 인터페이스들을 실제 물리 세계에서 끌고 움직이는 경험은 마치 디지털 세상 속에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시티펜스>를 움직이면서 서로 엮인 피그마 컴포넌트들이 평면의 좌표 위에서 움직이고, 기능하고, 연동되는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려졌다. 인터페이스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공감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너무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출처: 박소라

 

<시티 펜스> (2022) 는 디지털 디바이스로 인해 데이터로 전환되었던 몸이 디지털 바깥에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 재현되면서 신체적 감각이 새롭게 공간의 척도로 재생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펜스가 도시의 공간을 분할하고 구획하는 경계가 되듯이, 디지털 속의 인터페이스는 디지털 공간을 분할하고 구획하는 경계가 된다. 

블로그 작성 중에 안 사실. 작품의 원래 구성은 사방이 반사되는 공간이 포함되어 있다. 벽면까지 + 표시가 더해져 진짜 좌표 공간 같고 훨씬 흥미롭다. 이미지와 글은 작가 포트폴리오 페이지에서 발췌했다.

 

 

 

City Fence (2022) — sora park

City Fence(2022) space dimension _ 5.7 x 5.5m  <시티펜스>는 <Brain & Soul (2022)> 반사필름으로 만들어진 공간에서 재구성되어...

sorapark.xyz

 

<감각축적>

 

이 작품에서는 센서가 주체가 되고 관람객이 객체가 되면서 서로의 역할을 바꾼다. 사물이 감각기관(센서)를 가지고 주체성을 가지게 되는 반면, 관람객은 본인이 작품의 대상이 된 줄도 모르고 전시장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이 꽤 이상하게 느껴져 다시한번 '낯설게 하기'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센서는 전시장 복도를 향해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관람객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그래픽 패턴이 확연히 다르다. 전시 막바지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 센서가 쉬지않고 움직였고, 그 움직임을 따라 화려한 패턴이 연출되었다.

 

<Song from Plastic>, 우주+림희영

 

, 음악 재생 장면

에디슨의 틴포일 실린더 축음기를 통해 플라스틱 쓰레기에 새겨진 음악을 듣는 작품이다. 음악, 낭송, 목소리 등 다양한 음성이 각각의 쓰레기에 심어져있으며, 전시 시간대별로 서로 다른 음악을 틀어준다.

 

<기계 태양의 정원> , 김을지로

 

마치 태양열 전지판처럼 보이는 판넬에 질감이 가득한 식물의 3D영상들이 흘러 나온다. 식물을 주제로 한 3D 작업을 많이 하는 것 같던데 그래픽의 밀도나 형태, 재질감이 재미있었다.

 

같은 날 함께 본 <또 다른 달>, 김치앤칩스

 

다른 이야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교수님이 전시해서 보게 되었던 전시였다. 사물에 주체성을 제공한다는 주제도 재밌거니와, 무엇보다 디자이너가 주축이 되는 전시여서 좋았다. 그리고 그러한 전시를 기획한 것이 국현미라는 사실이 더 좋았다. 물론 주변만 봐도 호불호는 아주 강하게 갈리는 듯 하지만 말이다.

디자이너들이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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